언론 칼럼

'배반의 정치' 종지부 찍자

강병국변호사 2011. 6. 3. 00:20

<정동칼럼> '배반의 정치' 종지부 찍자
[경향신문]|2002-05-10|06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947자
선진국에서 살다온 친구들의 공통된 체험은 선진사회란 깨끗하면서도 재미없는 곳이라는 느낌인 듯하다. 미국에서 10여년을 살다온 친구는 재미없는 미국생활을 청산하고 이 땅에 정착할 것을 꿈꾸며 귀국했다가 1년 만에 미국으로 되돌아갔다. 그 친구는 딱 부러지게 돌아가는 이유를 이야기하진 않았다. 다만 아이들의 장래를 생각해보면 아무래도 돌아가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이 땅에서의 생활이 정감 넘치고 재미있는 구석도 있지만 불합리한 점이 많고 미래가 밝지 않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당장의 안일을 위해 이 땅에 눌러 있다보면 아이들에 대한 의무를 저버리는 결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타국으로 몰아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 친구는 미국의 유수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가 귀국하였기 때문에 현지적응이라는 측면에서는 수월하게 미국으로의 회귀를 결심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고희를 넘긴 한 선배는 얼마 전 산행에서 현재 50대라면 거리낌없이 이민을 갈 것이라는 뜻을 밝혔다. 그는 중앙일간지 주필을 지낸 경력이 말해주듯 이 땅의 대표적 지식인 중의 한 사람이다. 그런 분이 30년여의 언론인 생활을 통해 이 땅의 미래에 대해 갖게 된 전망은 암담하다는 말 한마디로 요약된다.

그러고 보니 선진국으로 공부하러 간 친구들이 학업을 마친 뒤에도 돌아올 기미를 보이지 않는 것은 당연지사인지도 모르겠다. 현지에 정착할 능력이 있는데도 귀국길에 오를 사람이 몇명이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씨랜드 화재참사로 이 땅에 환멸을 느껴 훈장을 반납하고 영구 이민을 떠난 전 필드하키 여자 국가대표도 있지 않았는가.

이민과 두뇌유출이 전세계적인 현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세계 최고의 소득수준과 삶의 질을 구가하고 있는 스위스 국민들 중 절반 가량이 이민을 고려한 적이 있다는 조사결과도 있다. 문제는 고급두뇌의 불균형 유출입으로 국민경제의 미래와 나라의 기반이 허물어지는 데 있다.

한 민간경제연구소가 최근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지난 5년간 우리나라의 두뇌유출현상이 급격히 심각해졌다. 고급기술인력의 육성능력은 미국이나 일본에 비해 크게 떨어지는 데다 고급인력의 유출이 미국, 일본보다 더 심하다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명약관화한 일이다. 국경 없는 시대에 이민과 두뇌순환현상은 국가의 존립을 위협하는 새로운 도전이다. 살기 좋은 나라, 밝고 건강한 사회, 인간의 존엄을 실천하는 나라다운 나라가 아니고서는 거주이전의 자유를 내세운 엑소더스를 막아낼 수 없다.

신토불이라는 말에서 나는 토종 먹거리를 먹어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이 땅의 문화와 소출들로 자라난 우리의 이웃들이 왜, 무엇을 위해 이질적인 타국에 몸을 의탁하여 인생의 마지막 승부를 걸고 있는지 그 까닭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땅의 정치는 민주주의를 표방하고 있지만 이른 시일 내에 내실있는 민주정치가 정착될 가망은 별로 없어 보인다. 경제는 한강변의 기적을 아득한 추억으로 간직한 채 도약보다는 내리막길을 걸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미래를 손바닥에 올려놓을 수 있는 교육은 또 어떤가. 각인의 능력을 최고도로 발휘하게 한다는 헌법 전문이 무색할 정도로 우리의 교육은 각인의 능력을 말살하는 방향으로 치달아왔다. 후손들의 다양한 재능을 무시하고 급변하는 세계 속에서 수십년 전 삶의 방편에 아이들을 억지로 끼워맞추는 교육으로는 미래를 열지 못한다.

사회는 가치관의 혼돈 속에서 이웃이나 동시대인에 대한 의무를 실천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다. 대선주자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원칙과 신뢰가 살아있는 사회를 만들겠다고 사자후를 토하지만 실현가능성은 희박하다. 게이트마다 대통령의 혈족과 인척, 가신, 청와대 국정원 지방자치단체 등의 고위관료, 민선 시장 등이 줄줄이 달려나오는 부패 창궐지대에서는 원칙과 신뢰의 싹이 뿌리를 내릴 수 없다. 당분간 정치가 희망을 주기를 바라진 않는다. 그러나 조국을 등지는 사람을 양산하는 배반의 정치는 제발 종지부를 찍어야 한다.

강병국 / 변호사bkk@henemlaw.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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