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못지키는 法, 안지키는 法 |
[경향신문]|2002-03-29|07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1791자 |
자동차를 몰고 왕복 2차선의 국도나 지방도를 달리다 보면 시속 60㎞로 되어 있는 속도제한 표지가 사람을 난감하게 만드는 일이 자주 있다. 제한속도를 지키려 하면 추월하는 차량들 때문에 사고의 위험을 느끼고 그렇다고 교통 흐름을 따르자니 단속이 마음에 걸리기 때문이다. 차량 통행이 뜸한 한적한 길을 달릴 때도 제한속도를 지키기란 결코 쉽지 않다. 계기판을 자주 들여다보지 않는 한 속도감을 느낄 새도 없이 시속 60㎞를 넘기 일쑤다.속도제한의 근거규정은 도로교통법과 그 시행규칙이다. 보슬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20% 감속 의무가 추가되므로 허용범위는 시속 48㎞ 이내로 더욱 좁아진다. 더구나 마을 어귀를 지날 때면 제한속도는 어김없이 시속 30㎞에 묶여 있다. 경찰관이 잡으려 들면 법망을 피해갈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다. 단속에 걸렸을 때 죄책감을 느끼기는커녕 재수없다는 반응을 보이는 것도 법령의 비현실성과 무관치 않다. 지켜질 수 없는 법과 제도를 고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우리 사회의 허구성과 표리부동한 면면들을 보여주는 사례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법령상 단란주점에는 접대부를 둘 수 없게 되어 있지만 접대부 없는 단란주점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휴대폰 가입시 보조금 지급으로 전화기를 거저 주는 것이 금지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무상 지급을 하는 업소가 적지 않다. 아파트의 실제 평수가 분양광고와 큰 차이가 나도 업자가 처벌받는 일은 거의 없다. 윤락행위 등 방지법이 수십년째 시퍼렇게 눈을 뜨고 있지만 전국 곳곳의 윤락가는 결코 겁에 질린 모습이 아니다. 바겐세일을 한다면서 세일전용 상품을 따로 만들어 파는 백화점. 끊임없이 뉴스를 생산해내는 가짜 휘발유와 가짜 양주. 식품위생법은 먹거리로 장난치는 작자들에게 솜방망이일 뿐이다. 시커먼 매연을 백주대로에 뿜고 다니는 버스가 곳곳에 난무해도 배출가스 규제법령은 잠자고 있다. 지켜질 수 없는 법과 지켜지지 않는 법이 뒤죽박죽이 된 상황이다. 무엇보다 광복 50주년을 맞아 단행된 건국 이래 최대 규모의 사면에서 국민 4명 중 1명이 죄를 씻었다는 사실이 법령의 비현실성을 웅변한다. 이런 속에서 반드시 지켜져야 할 법령까지 도매금으로 넘어가고 있다. 금융실명제 하의 차명계좌가 그 단적인 사례이다. 각종 게이트에서는 어김없이 차명계좌가 등장한다. 차정일 특검의 수사에서도 아태평화재단과 석연치 않은 돈거래를 한 김홍일 부이사장의 고교 동창 김성환씨의 차명계좌 6개가 발견됐다. 차명계좌는 실명전환 전의 계좌나 가명계좌에 비해 훨씬 파괴적이다. 비실명계좌나 가명계좌는 실명전환시 1993년 8월 현재 잔액의 50%가 과징금으로 날아간다. 비실명계좌나 가명계좌는 출금이 봉쇄되지만 차명계좌는 입.출금이 자유롭다. 현재 비실명계좌나 가명계좌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오로지 차명계좌만이 양지로 나오기를 거부하며 검은 거래와 지하경제의 온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까놓고 보면 현재의 금융실명제는 차명계좌에 활짝 문을 열어주고 있다. 이름을 빌린 사람도, 빌려 준 사람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차명계좌를 막지 않을 생각이라면 굳이 금융실명제를 존치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검은 속내를 감추고 정치와 경제의 투명도를 과시하는 장식용 정도라면 모르지만 말이다. 금융실명제에 큰 구멍이 뚫린 속에서 공직자윤리법에 의한 재산등록 제도나 정치자금법, 부패방지법 등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 검증할 장치가 허술하기 짝이 없는 공직자 재산등록 제도는 국민에 대한 사기극이나 마찬가지다. 개혁은 불필요한 법령의 과감한 철폐와 필요한 법령의 강력한 집행에도 초점을 맞춰야 한다. 강병국 / 변호사 bkkang7@hanmail.net |
'언론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무죄 판결은 권력분립의 표현이다 (0) | 2011.06.03 |
---|---|
'투기 시대' 최부잣집 교훈 (0) | 2011.06.03 |
대통령 아들과 비리 의혹 (0) | 2011.06.03 |
'배반의 정치' 종지부 찍자 (0) | 2011.06.03 |
지방선거와 히딩크 (0) | 2011.06.0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