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돈의 사회학 |
[경향신문]|2002-08-23|06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2058자 |
무인도에서는 돈이 필요없다. 화폐의 본질적 기능인 교환의 매개수단은 거래의 상대방을 전제로 한다. 그런 만큼 돈은 본질적으로 사회적 산물이다. 단신으로 월남해 자수성가한 팔순의 실향민 강태원 할아버지가 현금 2백억원과 70억원 상당의 부동산 등 평생 모은 재산 2백70억원을 며칠 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기탁해 감동을 주고 있다. 이어 교수 출신 사업가인 황상필씨가 주식 2백억원 상당과 현금 15억원을 대학에 장학금으로 기탁했다.강태원 할아버지가 전 재산을 내놓으면서 던진 말에는 축재의 법도와 축적된 부의 사용법에 대한 명쾌한 철학이 담겨 있다. 그는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벌었다면 성금을 내는 이 자리에 서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사회에서 축재가 부정과 비리의 결과물로 비쳐지고 있는 현실을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인사청문회에서 공직 내정자가 단지 많은 부를 축적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비판의 도마에 오르는 게 현실이다. 강태원 할아버지는 어릴 적 가친으로부터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길'이라는 말씀을 항상 들었다면서 "자식을 제대로 키우려면 재산을 한푼도 물려주면 안된다"는 부의 세습에 관한 가훈을 밝혔다. 부의 세습에 관한 이러한 철학은 지난해 미국에서 벌어진 상속세 폐지법안을 둘러싼 논쟁에서 미국의 거부 중 상당수가 상속세 폐지를 반대한 이유와 거의 일치한다. 지난 7년간 부동의 세계 최대 부호 자리를 고수하고 있는 빌 게이츠의 부친 윌리엄 H. 게이츠 시니어는 "상속세를 폐지하면 억만장자들의 자녀만 살찌게 하고, 부잣집 아이들이 사업상 창의성을 발휘할 가능성이 크게 줄어들 것"이라면서 상속세 폐지에 대한 반대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만약 빌 게이츠가 아주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다면 지금처럼 의욕적으로 일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올들어 삼영화학 이종환 회장이 사재 3천억원을 출연하여 국내 최대의 장학재단을 설립한데 이어 삼성그룹이 이건희 회장 등의 사재 출연과 계열사들의 추가 출연으로 5천억원 규모의 장학재단 설립 계획을 발표하는 등 부의 사회적 책임을 실천하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다. 또 익명의 독지가가 어렵게 모은 재산을 장학금으로 쾌척하는 흐뭇한 소식이 종종 언론에 보도되는 등 소득의 일정 부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기부문화가 차츰 확산되고 있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무기명 장기채권이 품귀현상을 빚는 등 세금없이 부를 세습하려는 욕구도 여전히 강하다. 강태원 할아버지가 말했듯이 '자식에게 재산을 물려주는 것은 자식을 망치는 지름길'임을 인식하지 못하는 졸부들이 많은 탓이다. 우리는 과거 7공자의 엽색 행각을 비롯하여 최근의 수표족에 이르기까지 부자 2세들이 벌이는 무책임한 방종과 타락을 끊임없이 목도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많은 유산을 남겨주는 것을 자식 사랑의 길로 믿는, 미망에 빠진 졸부들 또한 많다. 흔히들 돈은 양날의 비수라고 말한다. 돈을 잘못 쓰면 패가망신을 자초하는 화근이 됨을 일러주는 말이다. 더구나 우리에게는 자본주의의 껍데기만 타율적으로 이식되어 자본주의의 기초를 이룬 근검과 절약의 정신적 토대가 허약함을 부인할 수 없다. 특히 단축된 경제개발에서 이루어진 부의 축적과정에는 노력의 대가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많다. 축적된 부의 상당 부분이 부동산 가격 급등에 힘입은 것이기 때문이다. 이는 불로소득이며, 부동산을 갖지 않은 사람들로부터 부의 축적 기회를 빼앗아 가로챈 부분이기도 하다. 비단 부동산 투기뿐만 아니라 각종 부정부패가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는 이 땅에서 부정한 경로와 부정한 방법으로 돈을 번 사람들이 이 사회에 속죄하는 길은 부의 사회적 환원이다. 부는 거래의 산물이다. 거래는 상대방이나 사회를 전제로 한다. 사회가 있어야만 돈을 벌 수 있다. 축재가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 곳에서 자본을 가치의 우위에 두는 자본주의는 설 자리를 찾기 어렵다. 미국의 거부들이 상속세 폐지를 반대하는 이유도 부와 함께 명예까지 획득하려는 장기적 포석인지도 모른다. 가진 자들이 소외된 이웃과 함께 나눔의 미학을 실천하지 않고서는 명예롭고 존경받는 부를 일구기 어려움을 일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bkk@henemlaw.com 강병국 / 변호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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