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 칼럼
법치의 사각지대
강병국변호사
2011. 6. 3. 00:11
<정동칼럼> 법치의 사각지대 |
[경향신문]|2002-11-15|06면 |45판 |오피니언·인물 |컬럼,논단 |2057자 |
법치는 주관적 심치(心治)와는 반대되는 객관적 기준에 입각한 통치이다. 헌법이 있고 법령이 제정되어 있다는 것만으로 법치주의가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국회의 입법 절차에 관행화된 흠집이 드러나 물의를 빚고 있다. 의결정족수 미달 법안을 재의결하는 진풍경을 보였고, 재의결 과정에서 대리투표라는 몰상식의 극치까지 선보였다. 국회 본회의장에 재적의원 과반수에 턱없이 부족한 70∼~80명의 의원만이 참석한 가운데 통과시킨 법률안이 거센 비난 여론에 부딪혀 재처리된 것은 헌정사상 초유의 일이다. 그런데도 재의결 과정에서 대리투표를 감행한 의원들이 있었다는 사실은 국회가 재의결의 부끄러움을 절감하지 않았다는 방증이다. 초등학교의 반장 선거에서도 허용되지 않는 대리투표를 헌법기관인 의원들이 하고 말았으니 이 나라 민주주의의 기초가 얼마나 부실한지 한탄을 금할 수 없다. 국회의원들이 보여준 이러한 법률 경시 풍조는 국회의 생산품인 법률의 품질을 스스로 비하하기 때문일 것이다. 법률안 명칭만 훑어보고 1분에 한 건씩 처리하는 법률에 대하여 의원들이 존중심을 가질 리 없다. 의결정족수를 채우지 못한 법률안 통과는 헌법 제49조의 다수결원칙 위반이다. 대리투표는 국회법 제111조 위반이다. 국회의 의사 절차나 입법 절차는 그동안 국회의 자율권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사법심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노동법 파동을 부른 1996년 12월의 날치기 법안 통과사건이 헌법재판소의 심판을 받게 되었을 때 헌재는 다음과 같이 판시했다. '법치주의의 원리상 모든 국가기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기속(▦束)을 받는 것이므로 국회의 자율권도 헌법이나 법률을 위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허용되어야 하고, 따라서 국회의 의사 절차나 입법 절차에 헌법이나 법률의 규정을 명백히 위반한 흠이 있는 경우에는 국회가 자율권을 가진다고는 할 수 없다' 국회가 당초 회의장 주변 복도와 휴게실에 있는 의원들도 본회의장 출석 의원으로 간주해 온 관행을 주장하다가 법안 재처리로 선회한 것은 이러한 헌재의 입장도 고려한 듯하다. 재적 의원 과반수가 출석하지 않은 상태에서 의결된 법률은 헌법 제49조에 위반되어 무효로 심판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국회의 법률 경시 풍조는 범죄 피의자로 되어 있는 의원의 불체포특권을 보장하기 위하여 방탄국회를 여는 모습에서도 나타난다. 의원의 불체포특권은 국회가 행정부의 독재를 통제하고 자주적으로 활동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부여된 것이다. 그러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알선수재의 피의자가 된 의원들의 체포동의안이 몇 개월째 처리되지 않고 있고, 검찰 소환에 불응하는 의원들의 막가파식 행태도 개선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국회의 체포동의안 처리 지연은 국회의 자율권에 속한 문제로서 법률을 위반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체포특권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결코 정당한 처사는 아니다. 최근 법원이 김대중 대통령의 3남 홍걸씨에게 내린 판결도 합법적이긴 하나 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선 36억원이라는 알선수재 액수에 비추어 볼 때 지나치게 관대한 판결이고, 이는 국민의 법 감정에도 반한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망신을 사고 있는 이 땅의 부패지수와 대통령의 아들이라는 상징성에 비추어 법원의 이번 판결에서는 권력형 부패 척결이라는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려는 의지를 읽기 어렵다. 또한 홍걸씨에 대한 집행유예가 형 홍업씨에 대한 실형 선고를 감안한 조치라고 하지만 이는 당초 홍걸씨의 선고일이 홍업씨보다 앞서 있었던 점에 비추어 여전히 부당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즉 당초 예정된 대로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홍걸씨가 실형 선고를 받고 홍업씨가 집행유예를 받았을텐데, 홍걸씨 변호인이 선고기일 연기 신청을 내고 재판부가 그것을 받아들이는 바람에 실형 선고의 대상자가 바뀐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이다. 법의 제정 과정이나 집행 과정에서 실질적 법치주의가 미치지 않는 사각지대가 널려 있다. 법에 위반한 것은 아니지만 부당한 느낌을 주는 법 집행은 실질적 법치와는 거리가 멀다. 국가는 정의의 관리자라는 목표 이외에 다른 더 높은 목표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고전적 명언을 되새겨보아야 할 때다. 강병국 / 변호사 bkk@henemlaw.com |